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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수 : 3055
2013.05.05 (18:51:50)
수상부문:  행복상 
이름:  최미란 

“우리 집에 새끼 악어 키운다. 보러 와라.”

보성에 계시는 친정아버지의 수화기 너머 음성이 장난스럽다.

“엥? 악어요?”

얼마 전, 아들이 학교에서 새끼 오리를 데려와 키우기 시작 했노라며 오리 키우기에 관해 이런 저런 질문을 한 나에게, 이번엔 반대로 전화를 하셔서 악어이야기를 불쑥 꺼내셨다. 사연인즉, 산에서 괴목을 구해 다듬고 칠하고 보니 예쁜 악어 모양이 되었노라 하셨다. 또 마당에 철쭉이 만발 했노라 하시며 사진 찍어 보내 주고 싶은데 전송하는 법을 모른다며 애석해 하신다. 5월이 되면 장미가 가득하니 이것도 보러 오라 하신다. 사흘이 멀다 하고 전쟁 위험이 있다며 서울, 인천에 폭탄이라도 떨어질까 노심초사 하시며 피난은 보성으로 오라 다짐도 받으셨다. 6.25를 겪어 보셨기에 자식들 걱정이 앞서 신다.

“아빠, 너무 멀어 어찌 갈까요” 하며 웃는 나에게,

“항상 차에 기름을 꽉 채우고, 비상식량 준비해 놓고.”

심각하고 구체적으로 말씀하시는데 당해 낼 재간이 없다. 마흔이 넘은 내 나이에 “아버지”라 부른 적이 별로 없이 지금도 항상 “아빠”라 부르는 참 철없는 나. 내 자식들이 커가니 다른 사람들 앞에서는 “아버지”라 부르나 그래도 전화나 뵐 때는 항상 “아빠”다. 몇 해 전, 아버지는 당뇨와 고혈압으로 인한 뇌졸중으로 쓰러지셨다. 다행히 꿋꿋한 재활의 의지로 건강을 되찾으셨다. 아프신 후 서울 생활을 정리하시고 새어머니와 함께 아버지의 고향이자 새어머니의 고향인 보성에 내려가셔서 제2의 삶을 살고 계신다. 쉰일곱의 젊은 나이에 아내이자 나의 친정어머니와 사별하시고 다시 고향 친척들의 주선으로 새어머니와 만나셨다. 친정어머니가 소천하시고 일 년이 되지 않아 새 어머니를 맞이하시겠다는 아버지의 말에 못내 서운했다. 친정어머니와 금슬이 유독 좋으셨던 아버지셨기에 나는 서운을 넘어 충격이었다. 자식은 언제나 이기적인가 보다. 언젠가 왜 그리 빨리 새 출발을 결심 하셨냐고 물으니, 달랑 남매 둘을 둔 아버지는, “딸은 인천으로 시집가 지 자식 키우느라 쩔쩔매고, 아들은 영국으로 공부한다고 훌쩍 떠나고 너무 외로워서 못살겠다.” 가족들과 단란하게 살던 생활이 하루아침에 없어지니 견디기 힘드셨으리라. 아버지는 유독 외로움을 잘 타신다. 눈물도 많다. 젊으셨을 때도 텔레비전 드라마를 보면서 항상 눈물을 흘리셨다. 남자는 나이가 들면 눈물이 많아진다는데 아버지는 젊었을 때도 여린 감성을 갖고 계셨다. 내가 어렸을 때, 각가지 사연과 애타게 찾는 가족들의 이름이 가득 붙여진 ‘이산가족 찾기’ 현장인 여의도광장을 데려가 보여 주시기도 하셨다. 아버지의 가슴에 설움과 한이 많으셔서이리라. 우리 아버지 세대는 국가적으로 힘든 시기에 태어나 치열하게 살아 온 세대이다. 한 분, 한 분의 삶이 한 편의 소설이다. 우리 아버지도 힘든 유년기를 보내셨다. 두 돌 넘어 아버지를 여의고 어린 과부가 되어 버린 어머니도 재가 하여 할머니 손에 자랐지만 할머니마저 곧 세상을 등지셨다고 한다. 어렵게 다시 찾은 어머니에게는 새 가족이 있었고 그 사이에서 일곱 살부터 산에서 나무를 하며 고생을 하셨다. 새 가족들에겐 아버지는 이방인이었고 미움의 대상 이였으리라. 어머니와 산에서 손잡고 운적도 많았다고 하셨다. 그것을 참지 못해 일찍 서울로 상경해 온갖 일을 하며 기술을 배우셨다. 내가 본 아버지는 유독 동물을 잘 치료하셨다. 직접 주사도 놓고, 약도 먹이고 치료를 하셨다.

옛날 동물병원에서 일한 경험이 있어 가능하다고 하셨다. 우리 집에 온 강아지들은 그래서 건강하게 잘 자랐다. 구두닦이, 아이스케키 장수 등 어린 소년이 할 수 있는 일들은 많지 않았다고 하셨다. 그 어려운 상황에 나쁜 범죄에 빠지지 않고 열심히 살아오신 아버지가 정말 존경스럽다. 한없이 불쌍하다. 대대로 집안에 손이 귀하고 단명하셔서 가세가 기울었다고 하신다. 어려서부터 아버지는 손재주가 좋으셔서 뭐든지 잘 고치시고 만드셨다. 80년대 중동 건설 붐이 일었을 때 아버지도 이라크 건설 현장에서 뛰셨다. 지금도 기억이 생생하다. 김포 공항에서 2년 만에 아버지를 보았을 때 태양빛에 바래버려 노래져 버린 머리카락과 구릿빛 피부. 집에서 기다리던 남동생이 울면서 뛰어나와 아빠를 반기던 모습. 온 동네사람들이 모두 나와 반가이 맞아 주었다. 이라크에 다녀오신 덕분에 우리 집은 그 당시 최신형 가전제품이 모두 구비 되었다. 웃음이 나오지만 모두 구경 왔던 모습도 생각난다. 가정적이었던 아버지는 늘 산과 들을 가족과 함께 했다. 캠핑도 하고 물고기도 잡고. 지금도 좋아하셔서 여름휴가 때면 언제나 우리 가족과 남동생가족은 아버지와 새어머니와 함께 여행을 다닌다. ‘열 효자 보다 한 명의 악처가 낫다’는 말이 있다. 나는 새 어머니에게 잘 하려 한다. 그러면 아버지께 잘 하시지 않을까 하는 사심도 있는 것은 사실이다. 젊어서 상처하신 두 분이 알콩 달콩 외롭지 않고 건강한 노후를 보내시기를 바란다. 어려서 남동생과 버스정거장에서 퇴근하시는 아버지를 손꼽아 기다리던 모습이 생각난다. 기다리면서 손가락을 꼽으며 “이번 버스에 아빠가 오시거든 미란이의 가운데 손가락에 착착 들어붙어라”, “5분 후에 아빠가 도착하시거든 미란이의 가운데 손가락에 착착 들어붙어라” 마법의 주문 인양 노래하며 기다리던 그 저녁 아빠의 손에 들린 누런 통닭 종이 봉지. 아버지는 외로웠던 자신의 유년시절을 이기고 당당히 사랑하는 가정을 만드셨다. 그 힘은 지금의 나에게로 남동생에게로 이어져 소중한 가정을 가꾸고 있다. 오늘도 남동생에게 전화가 왔다. 다음 주에 놀러 오라고, 1층 테라스에서 삼겹살 구워 먹잔다. 매형이 좋아하는 좋은 양주도 준비해 놓았단다. 아버지도 함께 계셨으면. 며칠에 한 번씩 내가 아닌 아버지가 전화를 하셔서 마당의 꽃 이야기, 백구 이야기, 토종 닭 이야기를 전하신다. 처마 밑 제비이야기도 차차 전해질것이다. 그런 아버지가 감사하다. 친정어머니는 내가 철도 들기 전에 애타게 보내 드렸지만 아버지는 오래 함께 하리라. 언제나 나의 아빠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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