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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ACE
조회 수 : 2961
2013.05.05 (19:08:57)
수상부문:  행복상 
이름:  김재숙 

  금년 아버님의 연세 아흔이 되셨습니다.

금년 4월 13일 토요일은 아버님과 어머님 결혼 칩십 주년 기념일입니다.

오늘 우리 육남매가 서로서로 통화를 해서 막내가 장소를 알아보기로 하였습니다. 제가 맏이이니 제 나이가 짐작이 가시죠?

지금으로부터 육십구년 전 일제 말기 아버지께서 일제 징용에 끌려 나가시게 되었답니다. 아버지는 우리 집안의 삼 대 독자 외아들입니다.

할머니와 어머니는 아버지가 살아 돌아오시길 기원하며 조끼를 하나 만들었답니다. 무명 광목으로 된 두툼한 그 조끼는 한 여름에 무척 더웠을 거예요

그러나 어머니와 할머니는 그 조끼를 들고 가가호호 방문을 다녔답니다.

그것도 처녀가 있는 집만 골라서요. 그리고 처녀들에게서 바늘 한 땀씩을 받았답니다. 당시 남자들은 징용을 나가면 손이 끊길까 염려가 되어 조기 결혼을 하고자 하였고 처녀들은 정신대를 피해 혼인을 하고자 하였으므로 처녀 있는 집이 별로 없었답니다. 그래도 어머니와 할머님은 수십 리 수백 리 길을 걸어 걸어 백명의 처녀들에게서 바늘 한 땀씩을 받아 목숨 수(壽)자를 새기셨답니다. 물론 이 비방은 할머님께서 늘 다니시던 먼 동네까지 이름이 난 용한 무당할머니에게서 받아 온 것이었죠.

드디어 아버지께서는 겉옷 속에 목숨 수 (壽)자가 새겨진 조끼를 입으시고 전쟁터로 나가셨습니다. 어머니와 할머니의 속은 타서 새카맣게 되었겠지요.

그 때는 마침 제가 태어난 직후였습니다. 딸이라서 할아버지께서 깊은 한숨을 내쉬시더랍니다. 그러나 누군가 그러시더랍니다. 딸을 낳아서 꼭 살아돌아 올 것이니 염려말라구요.

이번에 하늘이 서운하게 하였으니 다음엔 좋은 일을 주시지 않겠느냐고요.


아버지와 동네 친구분들이 일곱 명이나 나갔답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일까요? 아버님 나가신지 보름도 안되어 세상이 발칵 뒤집혔지 뭡니까?

해방이 된 거예요. 어머니께서 읍내에 나가셨다가 그 소리를 듣고 돌아오셔서 할머님께 말씀드리니 얘가 미쳤나? 하고 가만히 보시더랍니다.

잠시 후 여기저기서 만세 소리가 터지니 엄청 놀라셨겠지요?

얼마 후 아버지께서 돌아오셨어요. 그러나 함께 나가셨던 아버지들이 모두 돌아오지 않으셨어요. 전쟁이 끝난 지 칠십 년이 가까워오는데 말입니다.

이후에 아버지는 몸이 쇠약해지셔서 알쯩을 많이 하셨대요. 그래도 어머님은 온갖 정성을 다하여 아버지를 건강한 몸으로 바꾸어 놓았습니다.

아버님과 어머님은 육남매를 두셨습니다. 아버님과 어머님은 다른 부모님들처럼 온갖 고생을 하시며 저희 육남매를 키우셨습니다. 특히 아버님은 제일 맏이인 저를 서울로 데리고 오셔서 교육을 받게 하셨습니다. 차례차례 해를 거듭하며 동생들이 모두 서울로 올라와 학교를 다니게 하셨습니다. 어려운 가운데서도 여자인 저를 대학까지 가도록 혼신을 다하여 교육을 시키셨습니다.

시골 촌닭이었던 제가 서울로 올라와 교육을 받고 명문 대학을 나와 교사가 되고 교직의 꽃이라고 하는 교장까지 마치고 은퇴를 하였습니다.

동생들도 모두 자기 나름대로 삶을 일구고 자기실현을 위해 열심히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살아가면서 제가 제일 병치레를 많이 하였습니다. 그 때마다 아버지께서는 하루도 빠짐없이 제 병상을 지켜 주셨습니다.

직장에 다니는 남편이 힘들다고 일찍 들어가게 하시고 늙으신 아버님이 저의 병상을 지키시다니! 잊을 수가 없는 일이지요. 역시 자식을 생각하는 부모의 마음은 아무도 따르지 못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제가 항암 치료를 받으러 가는 날도 아버지께서는 일일이 날짜와 시간을 기억해 두시고 먼저 병원에 와 저를 기다리고 계셨습니다.

육십 여회에 걸친 방사선 치료를 받을 때에도 하루도 빠지지 않고 먼저 오셔서 기다리고 계셨습니다. 병원에 입원했을 때에는 관악산 연주암이라는 높은 산 꼭대기에 있는 암자를 찾아 기도를 하시고 오후에 병원으로 오셨습니다. 병원에서 면회시간이 끝났다고 돌아가시라 해도 저녁 8시 반까지 병실을 나가지 않으시니 나중에는 경비원이 포기를 하더라고요. 지금은 아무 때나 면회를 하고 간병인이 있어야 하지만 몇 년 전에는 면회 시간이 정해져 있었고 환자 외에는 병원에 있을 수가 없었거든요.

최근에 제가 수술하고 입원하고 했을 때 아버지께 알려드리지를 못하였습니다. 아무래도 연로하신데다 거리도 멀고 하여서 말입니다.

며칠 동안이나 소식을 전하지 못하니 아버지께서 드디어 동생들을 다구쳐서 알아내시고야 말았습니다. 아무 소리도 아니 하시고 침묵을 지키시더랍니다. 저도 마음이 많이 편치는 않았지요.

아버지께서는 오래 전부터 아들 딸 사위 며느리의 생일을 꼭 챙기셔서 가족모임을 하도록 하시었습니다. 그러니 어느 달에는 두 번 세 번 모이는 달도 있습니다. 처음엔 힘들다고 아우성이었지만 그렇게 하면서 모두들 집장만을 하고 넓히기도 하면서 늘어나는 가족 모임을 이끌어 왔습니다. 이제는 모두 모이면 삼십 명이 넘어요. 음식도 집에서 못하고 식당을 빌려 먹지요. 그래도 후식은 꼭 집에 가서 합니다. 케잌에 촛불도 켜고 줄줄이 어린 증손녀 증손자들은 노래를 불러 댑니다.

아버님의 연세 이제 구십입니다. 한 자녀도 잘못 되지 않고 손자 손녀 증손자 증손녀들이 모두 잘 자라고 있습니다. 예사로운 일이 아니지요.


아버님 이제야 인사드립니다.

아버님 감사합니다. 그리고 70회 결혼기념일 축하드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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